영감의 순간



한 동안 옛시절이 담겨 있는 앨범을 보지 못했다. 결혼하고 춘천 외가집에 가서 옛 앨범을 찾아내어 10년은 족히 쌓였을 먼지를 닦았다. 7살이나 되었을 꼬마애가 나였는데, 유치원 졸업식 쯤이 아닐까.

사진에 나와있는 정체 모를 꼬마가 나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이 책의 의도가 그러하듯이, 사진 안에서 발견한 내 기억이 더 재미있다.

 

사진의 한복을 사기 위해 따뜻한 봄날 할머니는 비장한 각오를 한다. 며칠 전에 작은 아들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손주를 입힐 한복값을 받아두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를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더 빛나게 할 예쁜 한복을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구해오는 것,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목표와 함께 할머니는 손주의 손을 잡고 중앙시장으로 떠난다.

 

중앙시장은 양키시장이라고도 불렀는데 춘천에 위치한 camp page에서 물건이 흘러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70-80년대 이후엔 대부분 보세 물건들이 많아서 보세 시장이라는 이름이 더 크게 행했고, 정식명칭은 중앙시장이었다.

 

여자들은 쇼핑에 타고 났다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우선 손주의 손을 잡고 가볍게 시장을 서너 차례 돌며 한복집에 안면을 익힌다. 한복집에는 들어갈 듯 말듯 약만 올린다. 그 다음부터는 한 점포씩 타깃을 정해 각개 돌파에 들어간다. 한복을 여기서 맞출 것 같은 뉘앙스를 폴폴 풍기며 점포 당 약 10분씩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는 가격도 묻지 않은 채 더 알아본다며 다른 한복집으로 차갑고 시크하게 떠난다.

 

이 다음 단계부터는 가격 협상을 진행한다. 한복집 주인들은 아까부터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던 할머니를 알아보고 이젠 사러 왔겠지-라며 성심을 다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후려치며 일대 한복집의 시장가격을 허물어뜨리는 대담한 공격을 시도한다.

 

마지막 한복집, 결국 할머니도 말이 안 되는 작전에서 조금 더 양보한다. 왜냐면 손주가 예뻐 보일 수 있는 옷감, 가격대와 주인 아주머니의 싹싹한 애티튜-드 등을 미리 점 찍어 놓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마지막 카드를 던진다.

주인 아주머니가 그렇겐 안 된다고 통사정을 한다.

할머니는 등을 돌리고 걸어 나온다.

 

한참을 걸어가던 할머니가 뒤를 돌아보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곤 손주에게 한 마디 한다. “일부러 잡으라고 천천히 걸어왔는디

 

이 사진의 한복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던 그 한복집 아주머니가 지어준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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