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얼마 전 아버지 제사로 인해 어머니와 누나들까지 우리 가족이 모두 모였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제사를 지낸 것은 근 10년 만이었다. 모여서 옛 앨범을 뒤척이다가 우리는 바나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20년 전, 아니 내가 기억하는 때는 바야흐로 25년쯤 전인데, 당시에 바나나는 몹시도 귀한 음식이었다. 바나나 한 개에 천 원.

 

화방을 운영하던 어머니는 퇴근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 뭐가 먹고 싶냐고 종종 물어보았다. 우리 삼 남매는 전화기 앞에 모여서, 어미 새 앞에 모인 둥지 안 까치들처럼 삐약삐약 답을 하곤 했다. 우리는 바나나를 참으로 좋아했다. 삼 남매가 “바나나~~~”라고 합창하듯 답 하면 엄마는 바나나를 사 오셨다.

 

어머니가 사오신 바나나 한 개. 우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큰 누나가 바나나 껍질을 사르르 벗기던 그 순간 퍼져 나오던 바나나의 달콤한 향기란!

 

 “야 너희들 300원 어치 씩만 먹어!”라고 하면 나와 작은 누나는 바나나 위쪽부터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고, 큰 누나는 첫째라서 400원 어치를 먹는 횡포를 부릴 수 있었다.

 

 왜 그 때는 바나나가 그토록 비쌌던 것일까. 난 그때로 치면 500원 어치도 넘을 만큼 한 입씩 베어 문다. 그래도 그 때처럼 파르르 떨 만큼의 기막힌 맛은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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