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아홉 살이나 열 살이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화방을 하셨기에 그 인맥을 이용해 공짜로 서예 전문가에게서 서예를 배울 수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글씨를 썼던 것 같다.
어느 날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았고 아버지에게 가훈을 물어보았다.
홀로서기.
보통 남들은 한자로 많이 적던데... 조금 쓸쓸해 보이고 배고픈 예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가훈대로, 나의 아버지는 홀로 섰다는 자기 연민과 함께 나도 그렇게 강하게 다부지게 묵묵하게 걸어가길
바랬던 것 같다. 그 과정엔 많은 외로움이 배경처럼 녹아 있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날을 다시 추억하다가, 이십 년도 전에 들었던 그 말처럼 내가 홀로 서서 잘 걸어왔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다.
후일 내 아들 딸이 내게 가훈에 대해 물어온다면,
나는 무슨 말로 그들에게 기억될지.
2010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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