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다며 이것 저것 상담을 청해오는 친구가 몇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예물에 대한 상담을
즐겨한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며, 중요하게 생각한 배경에는 몇 가지 경험이 베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천한 경험이지만 나는 가끔 노인이 된 것처럼 예물로 받은 시계를 보면서 사색에 잠긴다. 이것이
미학적으로나 시장경제적으로나 훌륭한 완성품이기도 하거니와, 만약 이것이 없다면 나와 와이프의 결혼은
그리고 그 결혼에 얽힌 추억은 참으로 기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기억에서 사라지면 섭섭할 이 소중한
순간들을 위해, 나는 쉬는 날이면 이렇게 똑 같은 탁자에 앉아 글을 쓰지만, 때로는 현물 그 자체가 많은 Story를 안고 있다. 물론 나의 결혼을 증명하는 도구엔 사회를 봐준 지인, 운전을 해준 동기도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은 각각 아는 이 ‘지인’과
동기동창 ‘동기’가 아닌,
실명임을 밝힌다) 또는 친구들이 돈을 모아 해준 이렇듯 내가 가진 생각에 확신을 더한 일을 얼마 전 겪었다. 은수저. 우리 가족은 지역에서 유복하고 명망있고 화목하여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남매 셋이 모두 개성이
뚜렷하였고 할머니를 모시며 전통을 이어갔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만큼 실력을 갖춘 분들이셨다. 그러다가 우리는 뜻밖의 사건들을 겪으며 가족해체를 맞았다. 누나는
유학을 갔고, 할머니는 시골 큰아버지 댁으로, 작은 누나는
큰누나를 따라 서울로,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닷가로. 그리고 나서 우리 가족이 제대로 다시 뭉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15년이 흘러서다. 우리는 명절이면 다시 모여서 웃음꽃을 피웠고 경제적으로도 모두 안정적인 독립에 성공하여 근심 걱정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전의 그 화목함을 다시 기억하고 불러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차... 제주도에 휴가 겸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은수저를 발견했다. 그 은수저는 내가 열살 즈음 해서
부모님이 사온 건데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은수저를 사용했다. 그 은수저는 때로는 제사상에, 때론 밥상에, 때로는
식탁에, 때로는 설겆이 통에서 기억된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게 뽀뽀하던 그 입속에, 또 때로는 내 입 속에, 때론
하얀 사기 그릇 속에 잡곡밥을 등에 업고 떠 있기도 했었다. 나는 그 많은 경우의 수를 한 숟갈에 담아서는
직감적으로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은수저와 함께 했던 장소, 사람들, 그리고 생각들은 더 뻗어나가 음식물이 보이도록 빙그레 웃던 웃음과 할머니의 염색한 검은 머리칼과 아직 초등학생인
서른 다섯의 우리 누나와 지금은 할머니가 된 어머니의 왕성한 사십대의 모습까지. 나는 어머니께 말씀 드려 이십 년도 넘은 그 은수저 두 쌍을 뺏어 가져왔다. 그 어떤 사진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도, 그저 이 숟가락 하나면 나는 아직 기억할 수 있는 감성이 있음에 감사한다. “그래서 예물은 좋은 걸 해야 해. 값이 비싸도
좋지만, 모든 것엔 Eternity까지 생각하길.” 왜냐면, 오십 년 후 낡은 함에서 우연찮게 그것을 발견하더라도, 충분히 추억할 수 있어야 하므로. - 은수저로 라면에 만 밥을 싹싹 핥아먹고, 2010년 추석이 지난 9월 24일, 올해 들어 가장 맑은 것 같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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