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외곽 소양강 너머엔 육림공원이라는 유일한 놀이 시설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는 ‘회전 놀이기구’가 덜렁하니 놓여있었고 야외 수영장, 늙어 빠진 독수리나 원숭이가 훈훈허게 모여 사는 동물원이 전부였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할머니와 둘이서 육림공원에 놀러갔다. 기억에 잘 차려 입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아끼는 흰색 블라우스(라고 말하기엔 창피하지만 할머니는 그 옷을 입으면 참 세련되어 보였다)를
입었고 나는 모자도 쓰고 반바지에 멜빵, 그리고 흰색 타이즈도 신었던 것 같다. 잠자리채와 잠자리 ‘생포’시 보관을 위해 대충 만들어
팔던 형광색 플라스틱 통도 가져갔다. 나는 난생처음 원숭이도 보고 날개를 펴면 내 키보다도 큰 독수리도
보았다. 원숭이가 하도 잔망스럽고 얄미워 보이길래 잠자리 채를 냅다 쑤셔 넣어 보았는데 원숭이가 두
손으로 잡고 놔주질 않았다. 밀고 당기기를 몇 번이나 했지만 결국 팔이 길고 힘이 센 늙은 원숭이에게
잠자리채를 뺏기고 말았다. 지금 생각에 강원도 소도시의 외곽 동물원에 있던 그 원숭이는 과천 서울대공원이나 다른 대도시에서 사람 구경이나 하다가, 세월에 한물 가 시골로 방출되다시피 요양 온 오랑우탄 정도였지 않나 싶다. 잠자리채를 빼앗기고는 분하고 또 무서워서 울어버린 그때는 ’86 아시아게임 전후로 기억한다. 먼 훗날 내 아들딸이, 내 조카가, 친구의 아들래미가, 허약해진 내 친구가, 선배가, 팔다리가
이젠 가늘어진 사랑하는 누군가가 원숭이에게 잠자리채를 빼앗긴다면, 그 어떤 힘센 원숭이라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흙바닥에 질질 끌려가서라도 잠자리채를 지키리라. 그러기 위해 오늘은 운동을 좀 해야겠다. 2010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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