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백조. 흔히 귀납법의 오류를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백조는 흰 색이라고 생각하고 정설로 받아들이지만, 만약 검은 백조의 존재가 발견된다면 그 동안의 정설은 모두 헛 것이 되고 만다.) 최근 베스트셀러 계열의 책들 중엔 이런 내용이 많다. 스웨이(Sway;동요하다 흔들리다 지배당하다)라는 책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죠슈아 벨이 350만불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를 해도, 그것이 정식 콘서트 장이 아닌, 야구모자에 청바지 그리고 지하철 역 앞이라면 사람들이 가치를 두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는 사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다. 사람의 인지 능력이란 제 아무리 떠들어 봤자, 허술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일이 마치 영원할 것만 같은 착각 속에 산다. 이성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매일 매일 죽음을‘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런 삶을 살면서 자신이 미래에 남길 발자취까지 생각하기란, 깨달음에 이르지 않은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내가 탈무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 거창한 서문을 쓴 건, 약 이십 년 전, 평이한 어느 날 아버지의 어떤 행동 때문이다. 남태평양 앞바다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허리케인을 불러온다는 이론처럼, 그 역시 그의 작은 행동이 후일 어떤 의미를 가질 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에 대한 재구성- 장난 반 진심 반- 취재 기자였고 상대적으로 시간의 융통이 많았던 40대 남성. 어느 날 시간이 남아, 좋아하는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CD를 사기 위해 상가로 진입한다. 최고급 LP Player와 진공관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앰프까지 갖고 있지만 대세는 CD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춘천의 중심상가라는 곳은 그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작아서, 가장 큰 것들은 다 중심상가에 있다. 그는 종종 서점에서 아들에게 만화책 따위를 사다 주곤 했는데, CD를 사서 나오던 중 큰 서점 간판이 자신을 붙잡는다. 그는 인문 교양코너에 가서 책을 고르던 중 탈무드라는 책을 고른다. 늘 만화책만 사다 주기엔 이제 아들에게 뭔가 의미가 될 수 있는 책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맨 앞에 아주 짤막한 글을 쓰고 그는 만족한다. 왠지 좋은 아빠가 된 것 같다. 후일 아들 녀석이 커서 어른이 된다면 혹시 멋지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는 어느 날 차고에서 청소를 하다가 깜박하고 차 뒤 켠에 던져놓았던 책을 발견하고 아들에게 선물한다. 아들은 시큰둥하다. 이제 열살이 된 아들은 조금 있으면 사춘기에 접어들게 될 거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간다. 그는 책을 사준 지 12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언제나 그대로일 것만 같던 소소한 살림살이들이 자취도 남기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그는 땅속에 묻히고 영혼은 다른 세계로 갔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에 슬퍼할 지 아닐 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아들은 뽀얀 먼지가 덮인 책장에서 이십 년은 더 되었을, 전에 아버지가 선물해 준 책을 열고, 기억 못 하고 있던 아버지 친필의 곡선과 꺾음에 감동 한다. 왜냐면 다른 어떤 곳에도 그의 친필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썩어 없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게 하기 때문에 멀리해야 할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작은 물건 따위가 때로는 시공을 초월한 영혼을 매개하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 내가 사는 오늘을 둘러보면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 어쩌면 그들은, 수십년 뒤엔, 오늘의 내 모습을 나의 모든 것으로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그것이 내가 오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고, 친구들과 동료들과 함께 웃으려는 이유이고, 휴일이면 내 작은 마당의 새싹과 풀에 물을 주고는 커피를 끓여 으레 이렇게 쓰는 이유이다. 2010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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