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고등학교 때에 강원도를 떠났고 서울 연희동에 살았다. 대학도 신촌에서 나왔고 제대해서도 신촌에서 살았고 회사도 신촌에서 가까운 마포에서 다닌다. 얼추 1996년부터라고 치면 벌써 15년 동안 나는 신촌과 연을 맺어온 것이다.

신촌을 광역권으로 보자면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홍대까지를 포함한다. 나는 홍익대학교에 대한 특별한 인연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자주 이야기했던 말이다.

아버지는 미술에 특출 났고 홍익대학교로 시험을 보러 왔다고 한다. 당시엔 대학에 들어갈 때에도 체력장이 필요했다. 할머니 말로는 턱걸이를 몇 개 이상 해야 하는데 아빠는 '파르르르 떨며' 그 턱걸이 개수를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이 말을 아버지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사례가 아니라, 아버지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종종 내게 이야기했다. 사실 이 사례는 아버지의 꿈이 한 차례 좌절된 사례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아버지는 각종 예술에 큰 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해서도 사진에 매우 몰입했었고, 어머니께 화방을 차려 줄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 사례는 내게는 또 다른 의미다
. 나는 내가 십 수년 간 인연을 맺어온 신촌, 그리고 홍대는 약 40십 여년 전 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시험을 치러 시골에서 올라와 밟은 땅이기 때문이다. 비록 건물과 길이 산과 강을 덮고 가로막았지만, 이 땅 이 동네 어딘가를 스무 살 아버지가 걸어가고 있었다.

신촌은 윤동주가 걸어다닌 길이고, 아버지가 시험을 치러 왔던 길이고,  시인 김수영이 살았던 길이고 장정일이 고민하며 돌아다녔던 길이다.

무심하게 바란다. 신촌을 떠올리면 보고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2010년 4월








'출판 원고 > 육림공원 원숭이 (199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난 떡볶이  (0) 2010.05.16
롤러 스케이트  (0) 2010.05.16
이젤  (0) 2010.04.24
강원도 인제의 옥반지  (0) 2010.04.17
Tannoy Speaker  (0) 2010.04.17
아버지와 문학 -2010년 1월 9일 토요일  (0) 2010.03.06
추억v.1 카테고리  (0) 2010.03.06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