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내가 열 한살이나 열 두살 때였지 싶다. 강원도 인제에 집 소유의 산이 하나 있었다. 산 밑에 기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집에 산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산 관리가 별게 있나, 말이 관리지 그냥 사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그 곳을 인제산으로 불렀다.

 

여름 방학으로 기억하는데 부모님과 나는 (누나들은 왜 안 갔는지 모른다. 함께 갔는데 기억에 없을 수도 있다.) 인제산으로 놀러갔다. 인제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고 할 정도로 먼 곳이다. 지금도 인제에 가면 얼마나 시골인지 모른다. 온통 산,, 그리고 계곡

 

인제산의 '인제집'에는 나보다 한 두 살이 많았던 형이 있었는데 이름은 '문호'였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촌놈처럼 생긴 그 형과 나는 궁합이 잘 맞았는지 금새 그 형을 '문어'라고 놀렸던 게 기억난다. 문호 형은 내게 처음으로 장기 두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생각해보니 내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닌 게, 한 두 시간 만에 장기를 다 배우고 문호 형과 한참을 장기를 두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뒤편에는 완만한 언덕과 계곡이 꿈속처럼 펼쳐지는 기름진 땅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아버지와 탐험하였다. 여기엔 뭐가 있고 저기엔 뭐가 있는지 새집 구경하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조그만 실개천 언덕에서 아버지는 손가락에 끼워두었던 옥반지를 꺼내 내 나이 또래로 보였던 풋풋한 나무 가지에 그 반지를 끼워 넣었다. 아버지와 나는 신났다. 내년이나 내 후년에 다시 꼭 와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반지를 다시 찾아 가기로 했다. 나무가 힘이 세지면서 반지를 부러뜨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 부분만 오목하게 들어간 채로 자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걸 실험해보기로 했다.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집에 돌아와 그 나무의 위치를 그려놓았다. 내 나이 열 한살 즈음이다.

 

아버지와 나는 그 이후에 인제산을 방문하지 못하였고, 나는 그 나무의 위치를 그려놓은 노트도 찾지 못하였다. 후일 인제산은 다시 누군가에게 팔렸다.

 

혹시나 강원도 인제 부근의 산 초입에서, 옥반지가 끼워진 희한하게 굽어진 나무를 보거든, 제게 알려주세요.

 

2010 4 17
이젤

 

어렸을 때 미술대회에서 몇 번 상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게 내심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버지는 심심찮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젤을 갖고 멀리 가서, 논이며 밭에 이젤 펴고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로 그렇게 한 적이 있다.

 

세상 어느 父子도 이젤, 스케치북, 18호 붓과 커다란 물통을 갖고 교외로 그림을 그리러 가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나도 그러해야겠다.

 

이게 마치 우리 가문의 전통이라도 되는 듯이.

 

- 2010 4 26일 토요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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