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아버지는 클래식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춘천 피카디리 극장 옆의 유명한 레코드 가게에 가서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산 게 기억이 난다. 나와 누나는, 아빠가 레코드 가게에서 "oo 씨의 oo앨범 있나요"라고 묻자, 마구 놀려댔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취미에는 돈을 잘 쓰는 편이었다. 클래식 음악의 LP는 책장 하나를 가득채웠고, CD로도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언젠가는 내 손을 잡고 시내 레코드 가게에서 1,000원짜리 과자 고르듯이 비싼 CD를 마구 구매한 적이 있는데, 아마 고급 CD 200여 장이 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거기엔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기 시작한 큰 누나를 위한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춘천 효자동이라는 곳에서 후평동이라는 나름의 신시가지로 이사를 가면서 나는 우리 가족을 위해 별도로 설계한 예쁜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누구나 살기를 꿈꿀 만한 아름다운 집이었다. 거실 앞으로는 푸른 정원과 앞 동네가 훤히 보이는 커다란 유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Tannoy Speaker로 음악을 지나치게 크게 듣곤 했다. Tannoy Speaker는 당시 들은 말로는 400만원 정도 했다고 하는데, 그게 20여년 전이니 지금 돈으로는 1,000만원이라는 이야기인 듯하다. 크기는 한쪽이 세탁기보다 조금 더 작은 정도였다. 그게 넓은 거실의 양쪽에 하나씩 있다고 생각하면, 그 커다란 스피커의 최대 출력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종종 음악을 크게 틀면 다른 집들 뿐 아니라 동네 전체에 음악이 울려 퍼지는 정도였다.

 

옆집과 그 옆집에서 저녁이면 컴플레인을 해오곤 했는데, 아버지 성격 상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돌멩이가 날아들어서, 거실의 커다란 유리에 금이 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그게 큰 음악 소리를 싫어하는 주변 이웃들의 소행임을 알고 있었다. 그 후로는 아버지는 음악을 크게 듣지 않으셨고, 컴플레인도 듣지 않았지만, 내 기억에서는 그때가 아버지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마지막 기억이다.

 

지금은 Tannoy Speaker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201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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