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이 책을 내는 것이 올해 목표 중 하나였다.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는 작년에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1,2월 동안 마구 써 나가긴 했으나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3월에 들어 서면서 대략적인 흐름을 잡을 수 있었다. 처녀출판임을 감안하여 지나친 미사여구와 기교가 첫 출판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도록 최대한 건조하게 써내려 가는 방향으로 각별히 유의하였다.

 

일주일에 평균 한두 편의 글을 쓴 것 같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나를 지탱해주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일이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추억하다 보면, 당시엔 바람이 불고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별다른 의미를 둘 수 없었다. 그런 시간들을 먼 세월로 흘려 보내고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와 보기엔 그 시간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렇듯 소중한 추억들인데도 시간이 흘러갈 수록 내가 하나씩 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책이나 신문, 인터넷 검색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 추억들을 기록하는 것이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 뭔가 대단한 걸 해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는 그 행위만으로도 말로 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억지로 옛 기억을 더듬다 보면 고구마 줄기처럼 나쁜 기억들이 덩달아 떠오르기도 하였으나,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혼자서 한참 깔깔댄 적도 있다. 재미있는 기억들을 새로 발견한 기쁨 역시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비록 이 출판이 나 스스로의 만족이기는 하나, 바램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을 소중하게 함께 나누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이래 봤자 이 책을 받는 이는 줄이고 줄여 오십 명이 되지 않는다-에게 내 행복의 근원을 한번쯤 구경시켜주는 것이다. 이십 년도 더 된 일을 행복에 빠져 적어 내려갔듯이, 지금 이 책을 나누는 사람들과의 추억도 이십 년 혹은 삼십 년 뒤에 미소를 머금고 써내려 갈 수 있길 기도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 산물을 함께 또 계속 나눌 수 있다면.

 

매 순간을, 미래에서 추억할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더 행복할 것이다. 또한 그 순간에 더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깨달음에 감사한다.

 

이 책엔 열 살 전후의 기억만을 담으려고 애썼다.

 

보잘것없는 이 성취물 덕에, 주말이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2010 11 13일 토요일.

산본에서




<이들에게 드립니다.>


빠다같은 영원한 룸메이트, 늘 든든한 마음 속 큰바위얼굴, 삶에 대한 의욕을 상기시켜주는 큰 손, 뮤지컬만 편애하는 응쿤, 꿈을 돌아보게 하는 에딘버러의 광대, 성당 결혼식에서 울음바다를 만들었던 편지의 작자, 내겐 늘 막내인 오리 고기집 젊은 사장, 내가 인생을 잘못 살면 따귀를 때려 줄 동생, 늘 사진을 찍어주기만 해 자기 사진이 없는 수줍은 청년, 카사노바서라 그런 게 아니라 순수한 마음 때문인 형, 1년 넘게 영어를 가르쳐 준 조나단, 사랑공장 공장장이자 작사가, 마음 속에 아직도 부러운 꿈이 많은 준서 아빠, 내게 기도해 줄 수 있는 이 중 가장 끝 발 있는 예비 신부님, 천둥 같은 바이크 소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진첩 같은 친구, 진정한 푸근함의 실존을 내 앞 자리에서 늘 보여주는 사람, 마음은 검지 않은 센서티브 명장, 여행을 꿈꾸는 보컬, 내 바로 앞에서 대학 면접을 치렀던 카피라이터, 동생 삼고픈 수상구조자격증 소지자, 와이프에게 들키면 싫어할 일들을 내게 많이 들켜버린 다비드, 동전 한 푼도 없던 내게 라면을 사들고 와주었던 비언시인, 훈남 부사수, 사색에 잠기는 게 취미인 바이올리니스트, 살과 관계없이 여전히 내면도 아름다운 선배, 프로로 변신한 두 아이의 평장, 외모로는 젠틀할 것 같은 아파트 분양 동기, 구수하게 농악을 치는 타이슨, 형처럼 든든한 예비 검사 동생, 한때 내 아들이었던 정작 후배, 잠탱이, 강릉 바닷바람을 맞아 입술이 두터운 친구, 첼로처럼 묵직한 게 매력인 친구, 10년 전 강릉으로 가는 새벽열차를 함께 탔던 순두부집 조카,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디자이너 아저씨, 그리스인 조르바를 생각나게 하는 선배, 내 가장 오랜 고향 친구, 도베르만처럼 멋진 찰떡 단짝, 꽃남 부사수, 내가 인정한 인간관계의 진정한 고수, 싸준 총각김치 은혜를 잊지 못할 손주 있는 누나, 고민을 안고 한강다리를 함께 걷던 종로 친구, 어디선가 일렉기타를 들고 다니길 바라는 광야의 락커, 이대에서 채팅으로 만났던 내 스무살의 산 증인, 아차차- 생각해내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하며 무릎을 치게 될 여기에 적지 못한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할머니, 청암 선생님,  해리 그리고 My one and only love 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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