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늙음 Aging에 대하여

생각 2011. 2. 5. 15:51

늙음 Aging

어제 저녁 MBC에서 방영한 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늙음 aging에 대한 짧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늙음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인 화두는 일찌기 육림공원 원숭이 단행본에 나와 있는 '개들을 통한 인생공부'에서 피력한 바 있다. [육림공원 원숭이/육림공원 원숭이 (1995)] - 개와 인생 공부 왜 귀엽고 발랄한 강아지들이 몇 달 가지 않아 한 숨 쉬는 따분한 개로 변해버리는가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늙음이라는 화두는, 결국 누구나 인생의 따분함을 느끼지만 마치 6개월 된 강아지처럼 호기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자아 선언적인 결론으로 끝났다.

내가 기억하는 늙음에 대한 두번째 기억은 에스프레소를 처음 맛보았을 때처럼 매력없이 강렬하고 씁슬하기만 했다. 김포 군부대에서 군간부로 2년여 시간을 보내며, 주말이나 당직근무를 선 다음날엔 주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여인네가 허름한 복장에 정리되지 못한 머리에 포대기로 애기를 등에 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가방과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 여인이 앉아 있었는지 서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여인의 얼굴과 자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피부나 생김새에서 귀품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의 외모는 전혀 꾸미지 못하였고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면 중심을 잡고 또 애기들을 챙기느라 품위 유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 여인의 모습에서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과거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잘 꾸미고 다니고 귀함이 풍겨나던 그녀에게 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고백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친구들을 만나기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면 그녀의 품위있는 생김새와 하얀 피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춰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곤 버스 옆 줄에 앉아 있는 구부정한 할머니처럼 늙어가겠지... 이것이 '늙음'을 생각한 약 5년 전의 기억이다.


최근 들어 늙어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매개들도 있었다. 행복의 조건 Aging well (한글 클릭시 한국어 서적으로, 영문 클릭시 영어 서적으로 링크 이동됨) 이라는 책인데 나이가 들어서도 행복했던 사람들의 특징을 연구한 일종의 보고서이다(추천도서). 그 책에서는 행복이란 결국엔 '만족'이며, 사람들 특히 나이가 들면 후배들과의 교류도 매우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 얼마전에는 MBC특집으로 이홍렬, 최병서 씨가 나와 추억의 고미디계 역사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이제는 백발에 거동조차 힘들게 된 코미디언 구봉서 씨가 나오셨다. 다행히 풍채는 나이가 들어서도 건장했고 나이 든 대선배로서의 카리스마가 고스란히 풍겨나왔다. 나이 들어서 초라해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절친한 파트너였던 고 배삼룡 씨는 먼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구봉서 옹은 아직도 이렇게 후배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점이 참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건장하고 에너지 넘치던 구봉서 옹이 "지금은 무릎이 너무 쑤셔서 외출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떼는 모습이 또 다시 나이듦, 늙음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내 기억 속의 구봉서 씨는 아직 젊고 왕성한데, 머지않아 그분의 부음을 들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된 MBC 스페셜은 노인들만 사는 마을을 (제일 젊은 할머니가 60대) 8년간 장기취재한 프로그램이다. (제목: 설특집 노인들만 사는 마을 8년의 기록 - 클릭시 링크화면으로 이동)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할머니나 할아버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선 그들 역시 열아홉에 시집와서 누군가는 스물 두 살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자식을 키워낸 여든 할머니.

6/25 영상에 나오는 꼬맹이들. 그 꼬맹이들이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때의 젊은 미군병사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고인.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이들은 지금 백살 가까이 된 할머니 할아버지. 그들 역시 지금 못지 않은, 아니 지금보다 더한 사랑을 겪었다.

늙고 주름진 얼굴에서 과거를 유추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늙고 주름지고 탄력을 잃은 얼굴은 누구의 관심도 되지 못하기에, 누구도 그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려 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가끔 지하철에서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연상해보곤 한다. 할머니들이 장난삼아 혹은 넋두리처럼 말하는 '나도 한 때엔 정말 예뻤지'라는 말은, 사실은 장난도 아니었고 넋두리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유추하지 않을 뿐이고 인정하기 어려울 뿐이다. 왜냐면 우리는 아직 그만큼 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머리로 '나도 언젠간 늙고 또 죽겠지'하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 나도 저렇게 늙겠구나!'라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가끔 미국 영화에서 명문고등학교의 중앙복도를 보면, 예를 들면 '카르페 디엠'을 외치던 키팅 선생님의 학교, 역대 졸업사진을 주욱 걸어놓는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젊었을 때엔 그들이 없어진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큰 사람들의 잘못은 집착이다. 그들은 일부러 집착하는 게 아닐 경우도 많지만, 자신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을 영원히 가질 것이라 착각한다. 내 주변의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나 집이나 차, 혹은 지금 그대로의 '젊음', 직업. 하지만 이런 것들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서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수많은 집착 중에서 '젊음'이라는 놈이다.

* Is this what you do with your eternity?

Groundhog day에서 하루하루를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Phil에게 Rita가 하는 말이다. 영생을 얻었다면서 결국 이렇게 사는 거니?

젊음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나갈 것이다. 그 속도를 체감하는 방법은 주변에서 '없어지는' 것들을 적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단 5분 씩만 상상해보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대하 드라마를 살다가 또 그렇게 없어진다. 그것이 늙음이라는 것이 하는 일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내 자신에게 묻는다.

* What would you do with your short life?

첫째, 지금 이 순간을 다만 살아가는 것이다. 단, 언제나 각성되어 있어야 한다.

각성의 내용이란 뭐 이런 것이다.
'박정희 시대로부터, 정확히 알수 없지만 대략 2060년 즈음까지가 내게 주어진 삶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있다. '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던지, 진정 원하는 꿈을 찾으라던지,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앞뒤 안가리고 달려드는 모양새가 될 뿐더러 왜 그래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결여되기 쉽다. 다만 이렇게 '각성'하자. 그러면 이 제한되고 값비싼 세월이라는 선물 안에서 내 스스로가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 자연스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훌륭한 일을 해냈던, 하지만 예외없이 늙음을 통해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없어진 위인들을 삶을 돌아보자.

둘째, 그 늙음에 대비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경제적인 준비가 다가 아니다.

늙고 힘없는 날이 와도 항상 의지하고 신명낼 수 있는 친구를 많이 만드는 일. 그 친구들과 크루즈 여행이라도 한번 하며 인생을 돌아보려 했을 때에 쓸데 없는 걱정을 나게 하지 않을 여비와 체력과 흉물스럽지 않은 노인의 커리즈마. 나만의 career를 계속 쌓아가고 또 그것으로 후배들을 양성하며 그들 앞에서 '중지없이 계속하여' 살아가고 존경받을 수 있는 일-사실 후배들과 좋은 관계를 계속 만드는 것이야 말로 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지인들 특히 후배들로 부터 존경받으며 늙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한 삶에 있어서의 가장 큰 축복이자 상이다.

늙음이라는 허탈함 안에서 기왕이면 희망을 보았으면 좋겠다. 이 말은 늙음을 허탈이 아닌 과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안톤 체홉은 '겨울 역시 인생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만을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대하소설로 보았을 때에 도입부분과 결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괘씸한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겨울이 춥고 건조해도, 우리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다. 추운 겨울날에도 우리는 사랑을 하고 일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순간을 그 순간을 남기자. 사진으로, 글로, 그림으로 또 때로는 생명으로. 그래서 먼 훗날 이 아름다운 순간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도록.

아이를 갖게 된 시점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다. 작은 화초를 하나 사야겠다.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2011년 2월 5일 토요일




Google 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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