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가정 하나. 나는 96세까지 살고싶다.
가정 둘. 배터리는 충전할 수 없다.
가정 셋. 열여덟 살까지는 부팅시간이다. 따라서 배터리는 열아홉 살부터 닳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78년이라는 시간이 내게는 주어졌다.

100 퍼센트가 78년이므로, 1퍼센트는 0.78년, 약 9개월 10일 하고도 반나절이다.
78년이 100 퍼센트이므로, 1년은 1.28 퍼센트이다. 10년은 12.82 퍼센트다.
나는 40년을 살았으므로 51.3 퍼센트를 소비했다.
내 인생의 배터리는 48.7 퍼센트가 남았다.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을 단순하게 생각해보니 몇 가지 통찰력이 생긴다.

배터리가 많을 때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찾는 데에 꽤 많은 노력을 쓰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게임이나 서핑만 하다가
배터리가 저전력 모드에 들어간다고 해서야 깨닫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 방황의 시간이 있다. 할일이 있긴한데, 괜히 이것저것 찔러보며 본질을 마주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배터리가 아직 충분할 때에,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해야할 일이 있다.
우리가 이 배터리로 어떤 앱을 쓸 지 결정해야 한다.
그럴려면 이것저것 시도하고 찔러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직 하나 뿐인 방법이다. 취향을 발견하고 쌓아가는 것.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다.
인생이라는 배터리를 잘 사용하기 위한 인생 전략이라고 할까.



인생이라는 영화 한 편을 찍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배터리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지만 어쩔 수 없고,
서둘러 스크립트를 쓰고
창작이라는 앱을 켜야 하는 것이다 - 그것도 배터리를 엄청 쓰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또 그 사람만의 길이 있다.

다된 배터리들이 어디선가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이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바란다.

첫째 배터리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배터리가 터져버리거나 심각한 오류로 회로가 나가버리는 경우가 왜 없겠는가.
둘째 내 배터리가 꽤 의미있게 쓰였노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배터리의 전당 같은 것이 있거나, 아니면 배터리 소설 공모전 같은 곳에서 내 이야기가 꼽히거나 말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배터리 표시를 잘 보세요.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나 잘 보세요.
배터리가 닳고 있는 걸 잘 보세요.
그것 뿐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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