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이어령 이름 뒤에는 몇 가지 수식이 붙는다. 명예석좌교수, 칼럼니스트, 작가... 그가 활동한 시간이 70년이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이름이 있겠지만, 나는 동료 작가로서 그중에 세 가지를 추려보았다.

 

 

첫 번째 이름. 초대 문화부 장관.

1990년 1월 3일 문화부가 신설되었다. 첫 장관이 이어령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먹고 살기 바빴던 대한민국이었다. 문화에 대해 창조적인 생각을 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이어령은 국립국어연구원을 신설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세우는 등 굵직한 성과를 냈다. 문화부가 신설되기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회식과 폐회식을 총괄하고, 굴렁쇠 소년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낸 것도 이어령이었다.

두 번째 이름. 우리 시대의 지성인. 

내 개인적 경험은 가방 끈 긴 사람은 나약하다고 말한다. 지성인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특히 지금 이 시대에 박사를 받고 교수를 한다는 것은 지성인과 큰 연결고리가 없다. 이런 시대에 진정한 지성인의 모습을 꼽으라면 이어령 선생 같은 분이 또 있을까.

이어령은 1956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등단한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문학비평에 <우상의 파괴>다. 겨우 스물 세 살에 불과했던 이어령은 당시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우상'이라며 질타하고, 주류 문단이 가식적이라고 비판한다. 문학은 시대를 흔드는 저항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이어령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이어령은 단숨에 언론사들이 탐내는 컬럼니스트로 등극한다. 후에는 김수영과 문학의 현실참여를 놓고 사설에서 갑론을박을 하기도 했다. 

1972년에는 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1977년에는 <이상문학상>을 제정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에 <이상문학상> 역대 수상집을 모두 읽으면서 작가의 꿈을 꿨다. 이어령 선생 덕이다. 

모든 지성인은 인문주의자다. 인문학을 모르면 박사가 아니라 박사의 할아버지라도 지성인 타이틀은 가당찮다. 이어령은 산업화 이면의 인간가치를 부르짖었다.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의 기술 너머의 아날로그적 정신가치 융합을 내다보았다. 그렇다. 사람들은 소비의 안락함에 갇혀 있다. 자발적 노예를 자청하는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은 인스타그램에 한 줄 올리는 Show-off 용 장식이 되어가고 있다.

세 번째 이름. 멋진 죽음.

이어령 선생의 장녀는 2012년 별세했다. 이민아 목사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이어령은 2016년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에서 자신을 한탄했다. 글에 미쳤던 아빠의 후회다. 딸을 안아 번쩍 안아 올리는 환상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이어령은 노년에 딸을 먼저 보낸 후에야 종교를 얻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죽음이 아니라 척수관으로 느껴지는 죽음을 통해서였다. 

펜데믹 시대에서도 이어령은 죽음에 대한 지성인의 사유를 보여줬다. 유작 <메멘토 모리>에서 이어령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 있던 죽음, 지금까지 알던 그 사자가 아니야. 두렵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봤던 그놈이 골목 어귀에서, 출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시장 가다가 딱 마주치게 된 겁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철학자나 성직자의 가르침보다 더 강렬하게, 이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사자를, 저 괴물을 코로나 19가 인류에게 보여주고 만 겁니다.”

이어령은 "자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는데, 2월 26일 오후 1시 그렇게 죽음의 세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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