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아침에 원고작업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울듯이 뛰어와 앞마당에 청솔모가 누워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놈을 묻어주고 오는 길이다. 생명과 죽음을 논하는 것에 비하면 원고를 쓰는 것은 아주 사소해보인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일이었다. 죽음이란 이렇게 삶을 각성시킨다. 

 

청솔모가 낙엽 위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눈은 졸린듯 반쯤 감고 있다. 아직 어리다. 모든 생명체에는 어린것들만이 가진 풋풋함이 있다. 그것을 분석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난 체 해봤자 이 어린 청솔모를 어리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우리는 여전히 야생이다. 

 

 

 

 

나무위를 뛰어다니던 청솔모가 나무 아래에 누워있는 모습은 영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세상에, 저 높은 잣나무에서 떨어진 게 틀림 없다. 나무 사이가 꽤 멀었는데 뛰어서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직 다 녹지 않은 땅을 곡괭이로 파내고 그 녀석을 반듯이 눞혔다. 그리고 흙과 낙엽으로 작은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재작년 봄인가, 작은 진박새 한 마리가 죽어있어서 그 녀석도 묻어주었는데, 그 무덤 근처다. 

 

 

 

 

무덤 위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돌담위로 깡총거리며 뛰어온다. 엇박자로 높다란 돌담위를 팔짝팔짝. 

 

타닥 탁, 다닥 닥. 

 

한 녀석은 저러다 떨어져서 목숨을 잃었다. 방금 묻어준 그 녀석 무덤 옆에는 날 닮은 아들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럭무럭 자라난다. 

 

청솔모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해서 이 숲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어도 그럴 것이다. 내 아들은 한 삼 일 슬퍼하다가 다시 자기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그런데 내 원고는 무엇에 대한 종이뭉치였더라? 

 

 

 

 

https://youtu.be/go3_ofBB0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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