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나는 강원도에 별장이 있다.

이 말은 스스로한테 쓰는 말이다. 내가 작아보일 때에 위로하기 좋은 말이다. ‘그래도 나는 강원도에 별장이 있잖아.’라고 말하고 나면 기분이 좀 낫다.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않는다. 강원도에 별장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은 캠핑장에 한번 쳐놓고 철수하지 않는 살림살이가 있는 정도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 별장살이를 한다. 동네 자체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보통 큰 텐트 두어개는 기본이다. 아예 오두막을 지은 사람도 있다. 살림살이가 보통이 아니다. 냉장고에 화목난로에 각종 주방용품이나 텔레비전은 기본이다. 그래서 한번 정이 들고 짐을 풀기 시작하면 쉽사리 철수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질 못한다.

살림살이 당 천만원. 이게 우리끼리 하는 우스개 소리다. 집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말 보통 살림살이가 아니다.

그나마 우리집은 좀 낫다. 처음부터 아내와 규칙을 정했다. 가끔은 이것저것 더 놓고 싶지만 살림살이를 너무 불리지 않는 것이 이 시골살림의 할대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것들을 치워야 하는 날이 무서워서다.

도시인들에게 나는 시골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삼년 정도 이런 생활을 했으니 나도 뭔가 조언을 할 정도는 된다고 위안해 본다. 어쨌든 초보자 딱지는 뗀 샘이다.

여러 가지 물건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놓으면 후회한다. 숲속생활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작고 사소한 물건인 것을 나는 깨달았다.

우선 텐트와 침낭과 작은 전기난로로 시작하길 바란다. 비를 피하고 따뜻하게 잘 수 있으면 준비는 된 셈이다. 그래도 감성을 좀 추가하고 싶다면 화로대와 라이터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한번 고생할 때마다 한번 씩 산다고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사야할 목록은 끝이 없다. 베게, 쓰레기통, 로프, 전자모기퇴치기, 도끼, 트렁크, 썬글라스, 망원경, 쿨러, 커피 메이커, 스테인레스 머그컵, 수저세트, 보온병, 귀마개, 집게, 바베큐 집게, 땅콩버터 스퀴즈 팩, 마티니 컵, 항균 물통, 캠핑 스타일 스웨터, 비니 모자, LED 후레쉬, 벌레 퇴치제, 스티커형 핫팩, 헤드램프, 곰 퇴치 스프레이...



내 자동차 트렁크에 이런 짐이 언제나 실려있길 바란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든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장화.

진흙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시골 생활의 큰 즐거움이다. 작은 도랑이나 깊지 않은 계곡을 건너가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 자체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 그러므로 장화는 목이 길어야 제격이다. 비 오는 날 숲길을 거닐면 장화로 촉촉한 흙바닥을 밟을 때마다 물기 먹은 숲내음이 피어난다. 장난꾸러기가 된 기분이다. 가장 깨끗한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도시에는 없다.



챙모자.

비가 좀 온다고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은 자연인의 자세가 아니다. 챙이 넓은 모자가 있으면 비가 와도 산책하기에 충분하다. 모자를 벗어 허벅지에 툴툴 물기를 떨어내면 된다. 그때의 기분이 또 말로 설명이 안된다. 자연은 감성이니까. 해가 쬐는 날엔 넓은 챙 덕분에 목이 익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머리를 감지 않아도 티가 안 나는 건 덤이고, 챙모자를 쓰고 다니면 누구나 산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흙 묻은 목이 긴 장화와 함께라면 더이상의 패셔니스타가 없다.
지팡이. 생각해보니 내 마음에 드는 지팡이는 자연에 있다. 그러므로 미리 챙길 필요가 없다. 숲속으로 들어가 내 마음에 드는 지팡이를 찾아 다닌다. 지팡이를 찾는 것 자체가 하나의 놀이다. 적당한 놈을 발견하면 잔가지를 쳐내고 손잡이 부분은 껍질을 벗겨서 부드러운 나무속살이 드러나게 한다. 그걸 짚고 흙길을 밟는다. 계곡물 사이의 돌 징검다리를 피해 일부러 물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지팡이를 짚고 나만의 작은 탐험을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하루동안 나와 함께한 지팡이는 장작이 되고 숯으로 자기의 소명을 다 한다.



의자.

경치가 좋은 곳에 의자 하나 두면 그곳이 내 별장이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새로운 뷰를 지닌 새 별장으로 간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면 어떠련만은 의자 하나 정도는 나를 위한 작은 사치다. 그 의자에서 나는 도시에서는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떠올리고 위로를 받는다. 불을 피우고 장작이 타는 것을 지켜본다. 산책을 다녀오면 의자 위로 청솔모가 떨어뜨린 잣이 굴러다닌다. 이름 모르는 새가 그걸 먹겠다고 의자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의자에 앉아서 어둠컴컴한 자연의 천장을 바라본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색 하늘이다. 책에서나 보던 별자리다.

“와 저것 봐.”

내 옆에 아무도 없는 걸 알아차려도 그리 민망하지 않다. 별이란 그런 존재다.

다용도칼.

숲속에서 떨어진 나뭇가지로 장난감을 만들고 괜히 흙바닥을 뒤집거나 장작을 솎을 때 우리 도시인의 두 손과 열 손가락은 얼마나 무력한가. 그 무력한 손으로 불 한번을 피우기도 어렵기에 우리는 라이터를 켜고 긁어모은 낙엽과 마른솔잎에 가스불을 대어본다. 그리고 불이 나무가지에 붙어 타오를 때까지 나는 칼로 연필을 만들어서 바닥에 낙서나 하는 것이다. 우리의 두 손가락은 부드러운 흙땅 위에 낙서를 하기에도 너무 연약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계곡에 담가둔 맥주를 두어 병 가져와 홀짝거리기 시작한다. 다용도칼이 있어야 하는 진짜 순간이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나는 별이나 타는 장작한테 혼잣말을 하다가 웃다가 침낭으로 들어가 잠이 든다. 꿈을 꾸지 않아도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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