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프롤로그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 내가 가장 되기 싫은 상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시큰둥'한 무엇이다. 속세의 한 가운데에서 좋은 제품을 잘 만들고 높은 마진으로, 오래오래 파는 방법을 짜내는 사람으로서, 혼자만 깨끗해지겠다는 생각은 버린지 오래다. 그렇다고 해서 흘러가는 대로 마음을 방치해서 풀린 눈에 아무 호기심이나 열정이 없는 사람은 될 수 없고..

내게 마음을 수양한다는 건, 닳고 닳아서 무던해지는 것이 아니라 닳고 닳아도 언제나 호기심을 갖는 일이다. 닳고 닳아서 무던해지는 건 아무런 노력없이 약간의 시간과 약간의 자존감의 포기만 있으면 쉽게 이룰 수 있다. 연인 사이에서 밀당하는 게 아니라 좋으면 그저 개처럼 꼬리를 흔들 수 있는 용기에 나는 비교하기 싫을 만큼 높은 가치를 둔다. 전략적으로 상대방의 기를 누르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모르면서 아는척, 알면서 모르는 척, 좋아도 싫은척하는 건 비겁하고 속물적이니까.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일 - 주인을 보면 '주인을 사랑하는 개'라면, 몸이 흔들릴 정도로 꼬리를 크게 스윙한다.
때로는 오줌을 벌벌벌 흘리기도 한다.
너무 좋아하면 주인이 싫증낼까봐 적절히 좋아하는 선을 정하고 자기 통제하지는 않는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말은 아니고,
최소한 '긍정적인 에너지'라는 면에서 나는
"개처럼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 글은 웃음기 가시지 않는 내 오랜 친구들과, 새로 알게된 친구들과, 미래의 나에게 쓰고자 기록한다.


두 가지 영감에 대해,

이런 글을 쓰게 된 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 나는 개를 무척이나 좋아해왔다. 열살 무렵에 내 꿈은 개 조련사였는데, 혼자 내가 살던 소도시에서 가장 큰 3층 짜리 서점에 틈틈이 가서, 개에 대한 모든 책을 다 섭렵했다. 나는 훌륭한 개들도 많이 키웠다. 당시 "번개"라는 투견대회 챔피언인 진도견의 첫 장손인 "진돌이"를 시작으로, 달마시안 (101마리의 개), 로트바일러(도베르만의 모종으로 히틀러의 경호견) 등의 명견도 키워보았다. 다분이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면이 있었던 나는 개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강아지와 함께 지내다 보면 재밌는 일이 많다. 아주 작은 상대방의 눈빛과 표정, 행동에 크게 반응한다. 손으로 얼굴을 꽉 움켜쥐는 척을 한다거나, 재빨리 옆구리를 슥 만지고 딴청을 피운다거나 하면 강아지들은 약이 바짝 올라서 펄쩍 펄쩍 뛴다.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마치 내가 아닌 새로운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놀이를 하면 강아지들은 현관까지 뛰어갔다 오기를 반복하며 혼자 흙바닥을 뒹굴고 침을 흘려가며 깽깽 짖기도 하고 괜히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아주 작은 손짓으로도 큰 기쁨을 얻는 강아지는, 다소 철학적으로 풀자면, 매사를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환원될 수도 있겠다. 천국은 순수한 아이들의 것이라고 2000년 전 예수가 말했다는데.

이런 강아지는 1년 정도가 되면 육체는 모두 성숙하고 영혼에도 시큰둥 바이러스가 조금씩 감염되기 시작한다.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일로는 강아지의 심장을 뛰게 할 수가 없다. 먹음직스런 고기 냄새라도 풍겨야 이 놈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주인이 들어와도 잠에서 깨지 않고 눈만 한번 흘낏 떴다가 감는다. 이름을 두세번 불러야 한숨을 쉬며 (정말 사람처럼) 걸어오는 일이 잦다. 개에게도 눈빛과 표정이 존재하는데 (나는 그걸 읽을 수 있다), 바로 이 시큰둥한 표정이 犬狀에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러 마리의 개와, 여러 분의 사람들을 겪으며 나는 이것이 우주만물의 순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특히나 좀 "흉하게 늙어간다는 것"은 바로 "시큰둥해진다"와의 동의어다.

모든 짐승이 그러할진데,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력과 노화와 병마에 저항해온 인간 도전정신에 비추어 볼 때에,
진정한 용기와 수양이란 이런 "마음의 늙고 병듦"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일일 것이다.

깨끗한 창문일 수록 작은 먼지에도 더러워 보인다.
더럽게 때가 낀 창문은 작은 먼지를 알아챌 수 없다.
셔츠의 목에 낀 때는 그날 그날 빨래를 해야 한다.
일주일만 묵혔다가는 영영 목때를 지울 수 없어 셔츠를 삶던지 버리던지 더럽게 입고 다닐 수밖에.

마음이 죽어가게 두지 말고,

시큰둥 바이러스를 끊임없이 죽여야 한다.

두번째 배경은 요즘 알게 된 
(마음이 혹은 육체가) 젊고 얼굴에서 웃음을 가실 줄 모르는 순수한 사람들로부터의 영감이다. [생각] - 늙음 Aging에 대하여 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세속에 찌들고 그야말로 모든게 시큰둥한 사람들을 보자면, 그들에게도 마음이 깨끗하고 호기심이 가득찬 시절이 있었겠지-라는 생각에 슬퍼진다. (당신도 얼굴에 웃음기가 증발되고 있다면, 이미 몹쓸 시큰둥 바이러스에 깊이 감염된 것이다) 내게 무슨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그 깨끗한 마음을 오랫동안 가꾸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연인이 헤어지는 시기는 남자가 군대갈 때, 남녀 중 누군가가 취업하고 사회에 진입했을 때다. 입대야 눈에서 멀어지다 보니 생기는 순리일테다. 사회진출에 따른 결별은 좀 다르다. 가치관이 바뀌면서 생기는 현상인데,

상대는 똑같지만 그를 사랑했던 나는 변해서 다른 나로 변해버린 것이다.

내 경험상 사회진출 전에는 무척이나 웃음이 많고 매사에 호기심을 보이던 친구인데, 2-3년 후에 만나보면 웃음기가 싹 가신 메마른 표정과 마음으로 바뀐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중한 친구를 몇 명 잃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와 싸운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새로 알게된 소중한 친구들이 몇 년 후에 겨울 낙엽처럼 바스락거리고 건조하게 변해있지 않길 바란다.


에필로그

거울을 보고 물어봐야 한다.
내가 시큰둥 병에 걸려서, 이 세상의 수많은 신비와 기쁨 대신
몇십년 후면 없어질 피조물이나 사람들이 억지로 틀지어 버린 제도에 적당선을 넘어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새로 알게된 친구가 집은 어디고, 자식은 얼마나 예쁜 짓을 하며, 여유를 즐기기 위해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시를 좋아했는지, 어떤 기쁨과 고뇌를 갖고 있는지 물어보는, 그래서 그 친구의 작은 놀라움에 크고 기쁜 놀라움으로 화답할 수 있는 "안 시큰둥"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다.


관련글:
[육림공원 원숭이.단행본/육림공원 원숭이 (1995)] - 개와 인생 공부 



십년 후의 내게 씀. 
퇴근시간에 갑자기 쓰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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