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문학이나 예술이 갖는 기능적인 효율성을 꼽으라면, 살아보지 않으면 혹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긴 시간과 깊은 고뇌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정연하지 못하게 설계된 지라 나는 한 가지 화두를 그럴싸하게 풀어내본 적은 없다. 다만 이 책에 대한 짧은 기록에 앞서, 이 훌륭한 문학작품과 함께 묶을 수 있는 내 경험을 적어본다.

군시절 주말이면 종종 시내에 나가곤 했다. 버스를 타면 커다란 보자기에 김치통이나 농작물을 담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이 둘을 데리고 탄 새댁이 버스에 탔다. 갓난 애기는 포대기로 등에 아무렇게 묶어 업었고 막 걸음을 땐 첫째는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잡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알 수 없는 짐들이 세련되지 못한 쇼핑백에 담겨있었다. 무릎이 나온 남루한 바지와 기름진 머리로 봐서 시골에서 사는 아낙네 모습 그대로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새댁의 얼굴에서 나오는 기품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에 자라 시골로 시집간 사람은 아니었다. 서 있는 두 다리의 기품이나 꼿꼿한 허리와 편 어깨의 각도,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듯한 목선과 얼굴 표정에서 귀한 품성을 느낄 수 있었다. 눈코입과 표정에서도 잘 교육받은 사람이 갖는 인격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름답지 않지만, 불과 5년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늘씬하지만 교양있는 매무새로 지나가기만 해도 고개를 돌려보았을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임을 어렵지 않게 추적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한참이나 긴 시간을 우울하게 보냈는데, 다름 아닌 이 아낙네 때문이었다.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불쌍해서도 아니었는데, 그 아낙의 과거와 현재의 운명만큼이나 슬픈 고뇌가 장마처럼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때가 스물 다섯이었다.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던 나는 언젠가 이 아낙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도 저 아낙처럼 남루하고 초라할 지도 몰라서 후일 거울 속의 모습을 창피하게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또한 어쩌면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 앞에서 몸서리를 치며,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슬픔에 빠지는 것이다." 245페이지


나는 누구인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는 예술에 관한 자서전이다. 골트문트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언가. 삶이란 무언가. 예술이란. 신이란.

송충이는 무엇을 먹고 사나. 풀잎이다. 골드문트는 자기 자신을 수도사가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이렇게 바라본다.

"너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며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74페이지

골드문트가 수도사가 되었다면 죽음 앞에서 얼마나 크게 후회했을까. 삽십 몇년 나를 관찰해서 스스로 써낸 낸 답안을 나는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정답인지 오답인지 아직 잘 몰라서 연필로 써두었다.



예술과 신, 혹은 완벽


"그는 예술자체에 복종했다. 예술은 얼핏보면 정신계의 여왕 같지만, 실은 하찮은 것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된 작업 공간이 있어야 했고, 작업 도구와 목재, 흙, 물감, 금 따위가 필요했으며, 노동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는 숲에서 누리던 거친 자유를 예술에 바쳤다." 267페이지

"우리같은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존재에서 세속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지. 그런데 자네는 하느님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재창조함을써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일세." 445페이지

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완벽을 추구하는 것. 나르치스는 그리고 골드문트는 감각의 세계에서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예술의 원동력이라 믿는다. 그들은 그 완벽의 세계를 신이라 부른다. 완벽하게 신에게 다가서려는 노력, 재현하려는 꿈이 서양인들로 하여금 보다 체계적이고 계보를 잊는 예술을 가져다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바로 몇 주 전에 '조금씩 꾸준하게 그러나 천천히'[생각] - 매일 꾸준히, 그러나 조금씩
라는 글을 썼는데, 내가 작으나마 이런 노력을 하는 데에는 골드문트가 생각한 것처럼 끊임 없이 완벽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파블로 카잘스는 나이 구십에 '아직도 내 첼로 실력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 순간에 카잘스는 신에게 가까워졌음을 느꼈을까. 조금씩 꾸준하게 그러나 천천히 한걸음씩 발전하는 기쁨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몇 달전부터 악기를 새로 배우고 있다. 나도 나이 구십에 그렇게 말할 수 있길, 그래서 최후의 순간엔 신을 만나보길 기대해본다.

골드문트가 보여준 예술(예술=완벽=신)에 대한 접근은,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다소 허탈한 환원주의에서 벗어난 시각을 내게 제시해주었다. 완벽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 얘기는 처음부터 달라진다. 그리고 완벽에 대한 절차탁마가 우리네 인생을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의미로 풍족하게 해준다. 골드문트에게 감사한다.



감각의 확장, 경험의 확장


골드문트의 험난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방황을 구경하다 보면 나도 저런 경험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골드문트의 기억에서 사라진 작은 경험들조차 골드문트 자신과 그의 예술혼에 DNA처럼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골드문트가 남긴 작품은 바로 그의 인생이다.

"그런데 한때는 단지 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사랑의 추억으로부터 떠올랐을 뿐인 이 내면의 형상이 끊임없이 바뀌며 성숙해 가고 있었다. 집시 여인 리제가 남긴 인상, 기사의 딸 뤼디아가 남긴 인상,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여자들의 얼굴이 저 근원적인 형상에 섞여들었다. 사랑했던 모든 여자들의 얼굴이 그 형상에 덧붙여져 새로운 모습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일체의 충격과 경험과 체험들이 그 형상으로 녹아들어 특색을 이루었다." 257페이지

우리는 때때로 애인의 얼굴에서 첫사랑의 사랑스러웠던 표정을 읽기도 하듯이. 배후에 거대한 감각과 경험을 거느리지 않고서는 결코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골드문트는 가르쳐준다.

사랑하고 부닥치고 깨져서 딱지와 굳은 살을 경험해봐야 더 크고 또는 더 아름답거나 완벽한 지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골드문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각] - 서평기록. 아직도 가야 할 길 The road less traveled 역시 나는 더 깨져야 하고 더욱 새로운 지평에 도전해야한다는 직감이 스며들었다.



후기


헤르만 헤세를 처음 알게 된 기억은 이십년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를 타다가 보따리 장사꾼들이 떨이로 파는 문고판 책들 중 헤르만 헤세의 단편집을 골랐고, 제목은 '붓꽃'이었다.

예술이라는 신비한 대상에 대해 한 단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듯하다. 내 안에 호기심이 동하여 음악,미술,건축을 아우르는 예술사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5kg은 될듯한 백과사전 급 예술사 책을 한 권 샀다. 물론 그 페이지를 펴기 위해서는 이 후기부터 마무리지어야 하기에 마음이 무척 급하다.

예술, 나에 대한 탐구, 인생과 인간에 대한 이 모든 경험과 고뇌의 끝에는 결국 하나의 단어가 남는데, 세상에서 가장 애매하고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단어 "사랑"이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자네만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 가운데 오직 자네만을 말일세.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는 어림도 못할걸세. 그건 사막에서 솟구치는 샘물이요, 황무지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은 걸세. 나의 마음이 황폐하게 메마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 닿을 수 있는 자리 하나가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네 덕분일세" 470페이지

골드문트와 조르바가 터키의 어느 초원에서 조우하여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골드문트를 위해 끊임없이 감각을 확장해야 한다. 어서 이 글을 쓰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골드문트가 수도권에서 나르치스를 처음 만났을 때엔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계획대로 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골드문트도 계획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갔지만, 최소한 나는 골드문트로부터 배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수없이 닥칠 수도 있겠다.' 골드문트로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배운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끝





메모해놓은 문구 기록용.


"조각상에 니스칠을 하고, 나무를 깎아서 설교 연단을 만들고, 작업실에서 기능공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고 그래서 옅의 모든 기술자들처럼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생생한 삶을 맛보고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름과 겨울을 느끼고, 세상을 구경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혐오스러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겪고 싶고..." 282


"꿈과 최고의 예술 작품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신비였다." 286


"뭔가를 소유하면서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존재가 덧없고 일체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들어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차없이 냉혹한 죽음을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00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섰일 때에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대체 불가능 한 것일까." 381


"노래를 부르거나 류트를 연주할 때 어떤 딴생각이나 사변을 좇지 않고 음 하나하나와 손가락 놀림 하나하나도 최대한 순수하고 완벽하게 표현하려고 애쓰듯이 말일세.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이 노래가 쓸모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노래에만 열중하는 법이지. 기도도 바로 그렇게 해야 하네" 439


"남자들하고는 멋지고 재치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었다. 또 그들은 예술가의 작업에 대한 이해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밖의 모든 것, 가령 수다를 떨고, 애교를 부리고, 유희를 즐기고, 사랑을 나누고, 무거운 생각 없이 기분 좋게 즐기는 것은 남자들 사이에서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가 필요했고, 정처없는 방랑을 통해 새로운 형상들이 떠올라야만 했다. 모든 것은 어딘지 모르게 늙어 있었고 진지하기만 했다. 뭔가 무겁고 남성적인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그런 분위기에 감염되었다. 그런 분위기가 자기도 모르게 핏속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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