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나는 육군 보병의 소총 중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처음 군대에 가면 군화-전투화를 지급받게 된다. 첫날 전투화를 신고 구보를 하고 이동을 하게 되면 발 뒤꿈치에 살갗이 벚겨지게 된다. 그리고 몇일이 지나면 증상은 완화되기는 커녕 점점 통증이 심해지고 나중엔 시뻘건 속살이 보이고 염증이 생긴다. 장거리 행군이라도 하면 뒤꿈치 뿐이 아니라 발가락 사이, 발바닥 곳곳에 물집까지 잡힌다. 이러한 고통을 겪어보기 전에는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전투화를 신으면 발 뒤꿈치가 까지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행군을 하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스타킹,밴드,생리대 그리고 내부인 경우엔 우유 뒷곽을 덧대거나 비누나 파우더를 바르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전투화를 받으면 발 뒤꿈치 부분을 사정없이 밟아 뻗뻗한 가죽을 부드럽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전 전투 속담은 해답이 아니다. 병장이나 중사, 중위쯤 되면 게으름뱅이처럼 보여도 쉽게 뒤꿈치가 까진다거나 행군시 물집이 잡히지 않는다. 왜냐면 이미 상처를 겪어보았고 곪아터져 보았고 그 경험들이 굳은살처럼, 그리고 실제 굳을살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설사 천리행군으로 물집이 잡혔다고 해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 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밖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너무 많이 재고, 겁내고, 위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어떻게 하면 쉽게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을까?


전투화를 생각해보자. 살갗이 까지지 않는 이상 절대 전투화에 적응할 수 없다. 행군을 하고 싶다면, 전투화를 신고 전투에 나갈 마음이 있다면, 일단 전투화에 발 뒤꿈치를 길들이기 위해 힘껏 까지고 또 까지길 두려와 하지 말길. 살갗이 까지기 싫다면 평생 말랑말랑한 덧신이나 슬리퍼를 신으면 그만이다. 대신 산에 가고 싶다는 꿈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산에 이미 오른 이들에게, 산은 뭣하러 오르냐느니 쓸모 없는 짓이라느니-라며 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신의 뒤꿈치 살갗이 까질까 두려워서 포기해야만 했던 과거를 숨기기 위한 작은 '두려움 덮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화에 대한 단상이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 인생이야.



몇일 간 고난의 조깅으로 생긴 근육통을 생각하며. 2011년 5월 22일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