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의 순간



끽해야 60년 살 친구의 인생을 더 값지게 하기 위한 짧은 단상.

어른이 되어 살아가다 보면 무척 슬픈 일이 많다. 화내고 짜증나는 감정이 휩싸이다 보면 그나마 슬픔을 간직하고 산다는 게 사치고 여유로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른이 되기 위해 수십 년을 짧은 세월을 겪다 보면, 어른이 된 내가 형체도 없고 가끔은 기억의 일관된 족보조차도 없는 오믈렛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서 온 걸까-하고 한번쯤은 고민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나열해보기도 하고, 밖으로는 표출되지 못하는, 그래서 남들이 보고 있는 '나'와는 다른 내면 깊숙한 곳의 '나'를 자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는 이런 나를 있게 한 트라우마라던지 아주 임팩트 있는 사건들을 꼭 추억해보기 마련이다. 실눈을 하고 과거 속으로 손을 휘저어 보면, 처음으로 아빠에게 회초리를 맞던 날의 슬픈 꼬마의 내 쭈빗대던 입이 떠오르는가 하면, 밤에 수퍼에 심부름을 보내놓고는 컴컴한 현관문에서 복도를 향해 귀신 목소리를 흘려보내던 누나 둘의 잠옷이 기억나기도 하고,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듣고는 나를 신경질적으로 목욕시키던 한없이 부드러운 엄마의 손끝에서 서운한 감정이 마치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좋다며 쫓아다니던 반푼이 여자애의 촌스런 머리띠며, 건의함에 교감선생님은 대머리라고 쪽지를 접어 넣을 때의 쾌감이나, 그 일이 발각되어 호되게 귀방망이를 맞았던 순간의 찡하던 고통이 느껴지기까지 한다면 과장일까.

그런데 뒹굴뒹굴 무위호식하며 삼일 밤낮을 상념과 추억에 잠겨본 들, 어른들이 결코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 있다는 건, 나 말고도 생각해본 사람이 많이 있을까. 그런데 무척 가슴아프고 슬프지만, 세상에서 가장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새까맣게 칠흑의 어둠처럼 한톨도 기억 못할 그 순간은 바로, 우리가 가장 사랑받았던 시간들이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세상으로 작은 발을 딛은 그 순간까지.

갓 엄마 자궁에서 빠져나온 아이를 본 일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뻘겋고 자그마한 것에게는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이 없이는 단 하루의 생명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징그럽던 것이 제법 뽀얗게 살이 오르고 걸음마를 떼면, 얼마나도, 예쁘다, 사랑스럽다, 내 새끼, 우리 애기, 천사...를 외치는지, 엄마는 네가 없이는 하루도 못 살겠다, 아빠는 우리 새끼 때문에 산다, 얼마나도 볼에 부비대는지, 첫 방귀 소리에는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모두 까르르 넘어간다. 사랑스럽고 작은 발가락을 조심스레 부여잡고 혹여나 부러질까봐 입술로 몇번이나 키스를 했던가, 하루에도 몇번이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가 내 눈을 바라봐 주기를 간절하게 쳐다 보았던가, 열이라도 있는 날에는 응급실에 가서 아이의 손가락 만한 손을 꼭 잡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을 찾고, 아이의 입술에서 꺼이꺼이 소리가 아니라 엄마라고 말해주길 첫 사랑에 빠진 사람마냥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는가, 아이가 까르르 소리내서 웃던 날 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가득 차 올랐을까,

아가는 새까맣게 다 잊어버릴텐데?

엄마 아빠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밉지는 않다. 하지만 퇴근길에 혹은 컴컴하게 구름이 낀 날에 괜스리 '내가 바랬던 삶은 이런게 아닌데 많은 것이 흘러버렸구나'하고 후회 한번 안 해본 부모도 없을 것이다. 그런 엄마 아빠는 금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가 하면,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간 이도 있고, 동시에 기억 못할 사랑을 받고 있는 아가들은 또 그렇게 순식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세월을 윤회시킨다. 그러므로 나는 아기인 동시에 할머니이고, 할아버지는 아기인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나를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이가 꼭 필요한 순간이 있는데,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게 참으로 여의치 않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날엔 나도 사랑받았으면 하고 울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날,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기에, 상상도 못할 만큼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도록 신은 기억을 아예 지워버린 게 아닐까.

그런 날,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써봤다.

내가 말로 한들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긴- 시간동안 네가 무척이나 사랑받았음을 인정하라고. 그게 누구이든, 아이는 그런 사랑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으니까. 당신이 고아던, 누구던.

2012년 3월 27일 퇴근길에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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